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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주의자의 감각 - 진지함의 강요 본문

어릴 적에는 리니지나 와우 같은 온라인 게임을 좋아했습니다.
사람들과 파티를 맺고 던전에 들어가 보스를 처치하거나
혈맹에 가입해 다른 혈맹과 사냥터를 두고 전투를 벌이는 것이 무척 재미있었습니다.
하지만 취업을 하고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그런 게임들과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바쁜 회사 일에 치여 야근하기 일쑤였고
그런 와중에 정해진 시간에 맞춰 사람들과 온라인에 모여 게임을 한다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캐릭터를 꾸준히 육성해 어느 정도 수준까지 키워 놓지 않으면 파티에 끼기도 어려웠고
때로는 혈맹에서 밀려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게임을 즐기는 게 아니라 밀린 숙제를 해치우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아마 그것이 온라인 게임에서 점점 멀어지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책을 읽는 일도 비슷해졌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책 한 권을 끝까지 읽는 것이 쉽지 않아 졌습니다.
국내 출장이 잦아지면서 그동안 잘 지켜 오던 생활 패턴이 무너진 탓도 있을 겁니다.
물론 KTX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책을 읽을 수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책을 읽는 간격이 들쑥날쑥하다 보니 이야기의 흐름을 이어 가야 하는 장편 소설은
좀처럼 끝까지 읽기가 어려웠습니다.
책을 펼쳐도 며칠씩 손을 놓고 있다 보면 앞부분의 내용이 가물가물해지곤 했습니다.
그러다 다시 읽기를 시작하는 것도 어쩐지 부담스럽게 느껴졌습니다.
돌이켜 보면 온라인 게임을 그만두게 된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좋아하는 마음이 사라졌다기보다는
좋아하는 것을 꾸준히 이어 갈 여유와 리듬을 잃어버린 것 같았습니다.
일상주의자의 감각
그래서 김이나 작사가님의 수필집을 집어 들었습니다.
소설과 달리 수필은 챕터가 짧고 간결하면서도
좋은 문장들이 많고
내용도 작가의 일상 이야기가 많은 편이라 읽기가 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몇 년 전
김이나 작가님의 보통의 언어들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때도 느낌이 참 좋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김이나 작사가님은 저와 같은 79년생입니다.
한 번도 만나 본 적은 없지만 동일한 시간을 살아온 사람이라 그런지
책 속에 나오는 이야기와 단어가 친숙합니다.
같은 시대의 단어가 문장이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반갑고 친숙한 기분이 듭니다.
거기다, 책을 읽으며 작가님과 저와 똑같은 생각을 하는 구절을 읽으면
서로 주먹 인사를 나누고 싶은 생각마저도 듭니다.
여러 문장에 공감하고 마음이 갔는데
그 중 저에게 용기를 준 구절을 여기 발췌해 봅니다.
진지하거나 감성적인 것에 쏟아지는 시선들이 있다.
내가 싫어하는 '쿨병'이라는 말도 사람들은 대충 쉽게 쓴다.
세상은 무르익지 않은 감성과 진지를 조롱하는 것을 즐기지만, 그것을 잘 지켜내자!
한 작은 개인의 진지함이나 감성 충만한 성향을 스스로 부끄러워하길
종용하는 세상에서 나만의 뜨거움을 잘 지켜낸다면
창작과 예술을 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그보다 더한 재산과 보석은 없을 것이다.
저는 얼마 전부터
시를 써서 블로그에 포스팅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사실 시는 가끔 생각날때 끄적여 두기는 했는데
막상 포스팅을 하려고 하니
사람들이 많이 들어오는 블로그도 아니고
제가 평소 만나는 지인이 드나드는 것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스스로 부끄럽고 손발이 오글거리는 느낌이 들어 비공개로만 올려 두었습니다.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아마추어 작곡가나 연주자부터
일러스트레이터, 웹툰작가, 게임개발자를 꿈꾸는 분들이
자신의 서툰 작품에 자신감이 잃고 용기가 없어
세상 밖으로 내 보내는 것을 꺼리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김이나 작사가님의 이 구절에 용기를 내 봅니다.
어설픈 창작물에 평생 조리돌림을 당하더라도 그건 그것대로 내 작품에 대한 평가일 테니까요.
누군가에게는 유치한 글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손발이 오그라드는 시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가 두려워 내가 좋아하는 것을 감추고 싶지는 않습니다.
잘 쓰는 것보다 중요한 건 일단 써 보는 것일 테고
잘 만드는 것보다 중요한 건
일단 세상에 내놓아 보는 것일 테니까요.
어쩌면 지금까지 저는 무언가를 좋아하면서도
그것을 좋아하는 제 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 지를 더 신경 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조금 덜 부끄러워하고 조금 더 솔직해져 보려고 합니다.
누가 알아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내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해서 하는 일까지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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