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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과 - 백세 시대를 맞이하며 본문

2012년부터 같은 회사를 다닌 동갑내기 친구와
오랜만에 지난 금요일 저녁에 만나 술을 한잔을 했습니다.
우리는 살짝 취기가 오르면 친한 친구들이 그렇듯이
대화 주제가 빙빙 돌며 늘 제자리입니다.
했던 얘기 또 하고 했던 얘기 또 하고...
그래도 재미있다고 서로 낄낄대며 놉니다.
'연금 고갈될텐데 우리는 칠십세 넘어서도 일 해야하지 않을까?'
빠지지 않고 단골처럼 등장하는 주제입니다.
'우리는 은퇴하면 연금이 고갈되서 땡전 한푼 못 받아.'
'우리는 칠십 넘어서도 일해야 돼.'
'그러니 늙어 죽을 때까지 일할 생각으로 지금부터 준비 해야해.'
딱 여기까지 도돌이표처럼 찍고 나면
돌림노래처럼 두세 번 더 반복하게 됩니다.
서로 으레 당연히 앞으로 벌어질 일이라 인정한 상태라
어떻게 준비할 지에 대한 플랜도 제법 탄탄한 편입니다.
주식, 펀드, ETF, 코인 등등
입으로는 워렌 버핏도 부럽지가 않습니다.
그래도 결국에는 결론은 하나로 귀결됩니다.
'그래서 우린 운동 해야해. 다른 거 없어. 오래 살면 뭐해. 건강해야지.'
만날 책상 앞에 앉아 키보드만 두드리는 일이 업이라
외계인 ET처럼
얇은 팔과 다리에 배만 볼록 나온 마흔 중반 아저씨 둘이서
'진짜 운동 해야 하는데... 내일부터는 운동하자.'
이런 술주정인지 결심인 지 모를 말만 탁구치듯이 주고 받습니다.
그렇게 친구와 늦게까지 술 잔을 기울이다
서로 건강하자고 덕담을 나누며 헤어졌습니다.
파과
이 소설은 조직에서 '조각'으로 불리는 65세 킬러 할머니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회사로 치면 정년이 한참 지난 나이지만
나이답지 않은 유연한 몸과 단단한 근육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킬러라는 임무를 수행하기에는 그녀의 몸 상태는 아슬아슬합니다.
예전보다 기억력은 흐려졌고 행동과 판단도 빠릿빠릿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총기를 얻기 위해 단골인 한 씨의 가게를 들립니다.
그녀가 젊은 시절부터 함께 일해 온 한씨는 대장암 치료를 받는 중이라 가게를 더 이상 운영할 수가 없습니다.
한 씨 대신 가게를 지키는 아들을 보며 주인공 '조각' 이렇게 생각합니다.
대장암으로 치료를 받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치료란 그야말로 상직적, 형식적으로서 외아들의 면피에 불과하다.
아버지 한씨는 이미 일흔넷으로, 운동을 계속해 온 조각과 달리 몸이 총제적으로
부실하며 수술 과정을 견뎌낸 것만으로도 경이로운 일이다.
평균수명이 아흔이든 백이든 그것이 노구 자체의 건강을 재는 척도는 되지 못한다.
평균수명이 높아진 것은 다만 죽음이 급습하는 시기를 과학과 의학이 지연시켰기 때문이고
그것은 효율이나 질을 완전 충족시키지 못한 채 생명 연장의 꿈에서 '연장'에 포인트를 맞춘 것으로서
평균수명 100세 시대의 노인란 어디까지나, 소원을 빌 적에 '젊은 모습으로 예쁘게'라는
옵션을 잊어 주름 잡힌 얼굴과 휜 허리로 구차한 영생을 잇게 된 예언 무녀의 운명에 불과하다.
요새 영포티, 영피프티 이런 말이 유행한다고 들었습니다.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연령대를 통칭해서 부르는 말이라고 합니다.
저는 그 어감에서 왠지 조롱과 비아냥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영(young)이란 단어가 불혹을 넘긴 나이 앞에 형용사로 붙을 수 있는
작금의 상황을 보니 정말로 백세시대가 오긴 왔나 봅니다.
그래도 저는 소설 속 주인공 '조각'의 독백처럼
백세라는 숫자에는 꽤나 많은 허수가 녹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임플란트로 빠진 이를 매꾸고 인공관절로 닳아버린 연골을 채운다고
틀니를 낀 채, 무미의 식사를 하며 남은 생을 보낸 우리 옛 어르신들이 느꼈을
개선된 삶의 한계는 크게 다르지 않을 듯 합니다.
만약 본인의 의지가 아닌 타인의 의지로 호흡기와 약물에 의지한 채 살아야 한다면
과연 생의 일수를 하루 더 갱신한다고 한들
마지막 날 누가 목에 금메달을 걸어주는 것도 아닐텐데
본래 수명에 하루가 더해지나 십년이 더해지나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저는 작년에부터 집 근처 권투장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달이면 벌써 1년이 됩니다.
뭐 여전히 실력은 형편없고 몸이 극적으로 좋아진 것도 아닙니다.
그래도 꾸역꾸역 원비를 내며 출근하듯 다니는 이유는
이 비루한 몸뚱아리 써먹을 수 있을때까지 굴려 보려면
'억지라도 운동은 해야겠구나'
하고 어느날부터 생각이 딱 들더라구요.
소설의 제목 '파과'는
특정 부위가 검게 썩어서 상품 가치가 떨어진 과일을 뜻한다고 합니다.
저의 몸도 파과처럼 언제가는 결국에는
영 못 쓰게 될 정도로 망가져버리겠지만
그 시간을 조금이라도 늦춰볼까
소설 속 주인공 '조각'처럼
오늘도 억지로 땀을 내며 몸을 괴롭혀 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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