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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술의 세계사 - 술을 마시는 이유

스푸♡ 2025. 9. 16. 18:00

 
제가 처음 술을 마셨던 기억은 초등학생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친척들과 함께 저녁을 먹던 자리에서
밥상 위에 놓인 작은 도자기 잔 속 물이 유난히 맑고 시원해 보였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목을 축일 겸 마셨는데 그게 물이 아니라 정종이었습니다.
마시는 순간 쓴맛이 목을 타고 들어가 정신이 번쩍 들었고
텁텁하고 불쾌한 맛이 입 안에 가득 남아 한동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어른들은 왜 이렇게 맛없는 것을 일부러 마시는 걸까?'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커가면서 그 맛없는 술을 마시는 일은 점점 많아졌습니다.
스무 살 무렵에는 누가 억지로 권해서 마셨던 적이 훨씬 많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점점 자발적으로 술을 찾거나 누군가에게 권하는 날이 늘어났습니다.
불편한 자리든, 편한 자리든, 누군가와 어울리는 곳이라면
이제 술은 자연스럽게 저의 옆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그렇게 많은 술자리를 거치면서도
어린 시절의 질문인 '왜 술을 마시는가?'에는 답을 내리기는 쉽지가 않았습니다.

처음 읽는 술의 세계사

이 책은 대륙별로 술의 제조 기술과 역사를 다룬 책입니다.
술을 마시는 이유는 제각각이지만 만드는 방법은 이외로 단순합니다.
쌀, 보리, 옥수수, 사과, 포도 등 먹을 수 있는 재료만 있다면 누구나 술을 만들 수 있습니다.
항아리나 병에 재료를 넣어 밀봉해 두면 발효가 시작되고
시간이 지나 뚜껑을 열면 술의 원료가 됩니다.
곰팡이가 생겼다면 그것만 걷어내면 끝입니다.
이렇게 만든 술을 '밀봉주'라고 부르는데
'밀봉주'는 우리가 평소에 마시는 술과는 조금 달라 도수가 매우 낮아서
아주 옛날에는 남녀노소 누구나 마시는 음료로 쓰였습니다.
걸쭉하게 숙성된 경우도 많아서 음식을 대신하기도 해서 '마시는 빵'으로도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술판(?)을 뒤짚어 엎는 새로운 것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바로 증류기입니다.

증류기의 등판으로 10도 미만이었던 술의 도수는 40도 이상으로 급격하게 높아지게 됩니다.
그때부터 술은 누구나 마실 수 있는 발효된 음료에서
나이가 많은 어른들만 즐길 수 있는 새로운 마실거리로 정착하게 됩니다.
단순한 갈증 해소나 먹거리로서의 역할을 넘어 또 다른 영역에서 의미를 찾게 된 것이죠.
 
이 책에서 나오는 옛 성인 '플라톤'의 술에 관한 말을 소개해 봅니다.

플라톤은 "18세 이전에는 절대 와인을 마셔서는 안 된다.
서른 살까지는 적당히 마셔도 되지만 술주정을 하거나 과음을 해서는 안된다.
마흔이 되었다면 들뜬 기분으로 소란을 피워도 좋다.
와인이야말로 그들이 짊어지고 있는 인생의 무거운 짐을 가볍게 하고
괴로운 마음을 치유하며 젊음을 되찾아주어 절망적인 생각을 잊어버리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어릴 적 제가 느꼈던 "왜 이런 맛없는 것을 일부러 마실까?"라는 의문의 답을 차지 못한 이유는
어른들이 짊어지고 있는 인생의 무거운 짐과 괴로운 마음을
그 나이에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인 듯 합니다.
생각해 보니 저도 술을 마시는 이유는 맛 그 자체에 있지 않은 것은 확실합니다.
술을 무엇을 위해 또 누구와 함께 마시는 가에 따라 그 맛과 양(?)이 결정되는 듯 합니다.
기쁜 날에 술을 마시며 누군가를 축하해주고, 힘든 날에는 술을 핑계 삼아 마음을 털어놓기도 하고
때로는 특별한 이유가 없어도, 단지 사람들과 모여 있다는 것만으로도 술의 충분한 의미를 찾을 수가 있습니다.
술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아주 좋은 핑계거리인 셈이죠.
 
그래서 
'몸에도 안 좋은 걸 뭐가 좋다고 늦게까지 퍼 마셔?'
라고 누군가 핀잔같이 따지고 묻는다면
이제는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사람 때문에 마셨지. 그 놈의 사람 때문에...'
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