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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물일곱, 2등 항해사입니다. - 정박할 곳 없는 배처럼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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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물일곱, 2등 항해사입니다. - 정박할 곳 없는 배처럼

스푸79 2025. 3. 2. 06:00

 

재수까지 했지만 저의 수능 성적은 최악이었습니다.

솔직히 큰 기대를 하지 않았기에 실망도 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서울에 있는 대학을 지원하기에는 성적이 한참 부족했고

집안 사정상 지방대는 갈 형편은 아니었습니다.

97년에 터진 IMF의 여파는 99년도까지 유효했고 저의 선택의 여지는 별로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반쯤은 포기한 채

서울에 있는 몇몇 대학에 원서를 넣었습니다.

 

그러다 운이 좋게도

예비에 예비에 예비에 예비로

서울 근처에 있는 대학 영문학과에 합격을 했습니다.

사실 크게 기쁘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고등학교를 다니듯이 아무 생각 없이 대학을 다녔습니다.

 

군대를 전역하고 23살에 맞이한 대학 캠퍼스의 분위기는 뒤숭숭했습니다.

졸업한 지 1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알바를 뛴다는 선배 이야기.

군대 미루고 버티다 졸업반을 맞이하는 동기들의 바늘구멍 같은 취업문 이야기.

'영문학'이라는 이름만 그럴 듯한

실속 없는 학문을 배운다는 게

얼마나 헛헛한 일인지 그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군대에서 컴퓨터공학과가 졸업하면 취업이 아주 잘된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습니다.

그래서 과감하게 편입을 준비했고

컴퓨터 공학과로 학교와 전공을 동시에 바꿨습니다.

 

꿈.. 목표.. 이런 거 없었습니다.

그냥 2년 더 다니다가 졸업하고 백수로 살기에는 집안 형편이 녹록하지 못했고

이게 나에게 맞는 길인지 아닌지

스스로에게 따지고 고민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 덕분에 취업에 성공해서

프로그래머로서 20년 동안 밥은 굶지 않고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

 

나는 스물일곱, 2등 항해사입니다. 

이 책 내용 중 공감했던 글을 발췌해 봅니다.

나에겐 목표가 없었다.
...
나는 목표가 없기 때문에 더 열심히 해야 해.
기숙사, 공부, 밥, 잠. 그만큼 3년 내내 공부에만 매달렸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수능에서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고 결국 부산에 남아 있기로 결심했다. 재수는 생각지도 않았다.
...
취직이 잘 되는 곳을 찾다 보니 간호나 해양, 두 가지 선택지가 나왔고 
간호는 성격상 아닌 것 같아 망설임 없이 해양을 택했다.
...
그러다 대학교 3학년 때 실습항해사로 실제 선사의 배를 경험해 보는 기회를 가진 후
드디어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
'배를 타고 싶다!'

 

이 책의 작가님인 김승주 항해사님도 저처럼 목표가 없었습니다.

오직 취업만 생각하고

불확실한 길을 걷기로 결심한 점도 저와 무척 닮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저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태어나서 성장하며 학교를 다니다 입시를 준비했던

모든 세대의 공통된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무슨 이유로 공부를 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대학 입시만 바라보면서 살다가

어느덧 정신을 차려보니

주어진 일을 꾸역꾸역 해 나가며 살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서울의 3대 학원가로 유명한 강남의 대치동, 강북의 중계동 그리고 목동의

학원가 건물들은 오늘 휴일임에도 불구하고 늦은 밤까지

만선을 기대하는 어선의 불빛처럼 밤을 밝히고 있을 것 같습니다.

 

그곳의 많은 학생들은 그들의 선배들이 그랬듯이

정박할 곳을 정하지 못한 채 그냥 정처 없이 출항을 했을 듯합니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어떻게든 열심히 살다 보면 어느 곳이든 닿는다는 걸

알고 있기에 저는 그들이 크게 걱정되지 않습니다.

...

다만 혹시 원래 가고 싶었던 길이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너무 멀어져

영영 거기에 닿을 수 없게 될까 안타까울 뿐입니다.

 

저는 최근 오랫동안 방치했던 태블릿 펜을 다시 들었습니다.

녹내장으로 점점 힘을 잃어가는 왼쪽 눈을 깜빡 깜빡이며

많이 늦었지만 그래도 그림을 다시 그려보기로 했습니다.

어릴 적 꿈이 만화가였습니다.^^

 

'열심히 하다 보면 지금보다는 원래 가고 싶었던 곳에 조금 더 가까이 갈 수 있겠지'

하고 조심스럽게 기대하며

오늘도 작은 배 한 척을 망망대해를 향해 띄워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