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4 | 5 |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 시집
- 타이핑좀비
- 부에노비스타 소셜클럽
- openAI
- Python
- 게임개발
- 타자연습게임
- pygame
- Stable diffusion
- 황선엽
- 숨결이 바람이 될 때
-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 Ai
- 인생의 해상도
- Gym
- 나는 매트로폴리탄 미술관 경비원입니다.
- comfyui
- 쿠바전통음악
- frozen lake
- 단어가 품은 세계
- gymnasium
- 나는 스물일곱 2등 항해사입니다.
- 매트로폴리탄
- 타이핑 몬스터
- 어른의 행복은 조용하다
- 고양이발 살인사건
- 에르난 디아스
- 운석 피하기 게임
- 운석피하기 게임
- 트렌드코리아2025
- Today
- Total
스푸79 기록 보관소
돌이킬 수 없는 걸음 (feat. 손여은) 본문

어릴 적, 할머니는 저를 데리고 교회를 열심히 다니셨습니다.
목사님의 지루한 설교가 이어져도,
저는 졸지 않고 올망졸망한 눈으로 할머니 곁에 조용히 앉아 있곤 했습니다.
예배에 참석하면 신도들에게 나누어 주던 ‘주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예배 순서와 찬송가가 적힌 주보의 뒷면에는
‘오늘의 말씀’이라는 제목 아래 넓은 공란이 있었습니다.
목사님 말씀을 들으며 메모하라고 남겨둔 공간이었겠지만,
저에게 그 빈칸은 예배 시간 동안 맘껏 놀 수 있는 놀이터이자
저의 생애 첫 그림 연습장이었습니다.
저는 볼펜으로 일요일 아침이면 항상 보던 TV만화를 떠올리며
주보의 흰 여백이 그림으로 가득 찰 때까지 그림을 그리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너 그림을 어디서 좀 배웠니?'
국민학교 2학년 때 미술 시간
담임 선생님이 저에게 그렇게 물었던 거 같습니다.
저는 무어라 대답해야하는 지 몰라 눈만 깜빡였던 기억이 납니다.
그 뒤로 며칠 후
학교 수업하다 말고 놀이동산 같은 곳을 담임 선생님이 데려갔습니다.
옆반 몇몇 아이들과 다른반 선생님도 함께 따라갔습니다.
엄마와 함께 온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저는 이런 곳을 가는 줄도 몰라 엄마에게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속으로 놀이기구를 타는 줄 알고 좋아라 하면서도
저걸 탈 돈도 없고 빙빙 도는 게 어지럽고 무서워 겁도 났습니다.
담임 선생님은 저와 아이들에게 새 스케치북 주시고는
몇 시까지 그림을 그려서 내라고 했습니다.
그냥 저는 풍차같이 큰 것이 나무 사이로 천천히 돌아가고 있길래
그걸 보이는 대로 스케치북에 그려서 선생님께 냈습니다.
며칠 뒤 선생님은 제가 학교 대표로 나가서 상을 탔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게 저의 사생대회 첫 입상 경력이었습니다.
할머니는 교회 열심히 다닌 덕분에 주님께서 그림을 잘 그리는 달란트 주신 거라고 했습니다.
그 뒤로 교내 미술 대회에서 몇 번 더 상을 받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이사를 자주 다녔고
한 학기 겨우 채우고 학교를 옮겨 다닌 적도 많아
교내 미술 대회 참여는 커녕 친한 친구도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도 학교를 옮길 때마다
그림 좀 그리는 재주가 있어 드래곤 볼 손오공을 잘 그리는 친구로 불렸던 거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딱 중학교 때까지였던 거 같네요.
그림 좀 그린다는 말을 들었던 건...
'튜브 한 개에 오천 원'
제 중지 손가락만 한 물감 튜브의 한 개 가격이었습니다.
미술을 제대로 배우고 싶어 학원을 알아보던 중
미대를 준비하는 친구가 알려준 물감 가격에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미술이 원래 재료비가 좀 들어. 12색 한 세트사면 개당 3천 원 정도고.
12색 한 세트 사서 다른 색이랑 잘 섞으면 웬만한 색은 다 나와 '
책상에 앉아서 그림 그리고 있을 때
엄마가 저에게 해주시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환쟁이 하면 굶어 죽는다.'
그림을 그려서 가난해지는 줄 알았는데
물감을 사다가 굶어 죽는구나 싶었습니다.
'우리 아들 미술 한번 배운 적 없는데 그림 참 잘 그렸는데...'
이렇게 가끔 어머니는 자식 놈이 하고 싶은 걸 못 밀어줬던게 못내 아쉬워서 말씀하시곤 합니다.
'차~암까지는 아니고 그냥 안 배운거 치고 쪼~옴 했던 정도지'
저는 어머니 맘이 좀 나아질까하여 이렇게 대꾸하며 아쉬움을 덜어 드리곤 합니다. 한편으로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천재적인 재능이었다면 어떻게든 미술로 뭐든 되었겠죠.
아침 출근길에 음악을 듣다가
자주 듣던 손여은님의 새 커버 연주곡인 이병우의 '돌이킬 수 없는 걸음' 들었습니다.
곡을 듣자마자
어릴 적 그림을 좋아하던 시절의 제가 떠올랐습니다.
그렇게 이 곡을 하루 종일 몇번씩 반복하며 듣다
퇴근 후 집에 와서 유기되어 있던 판 타블렛을 PC에 연결했습니다.
무엇이든 오늘은 그림을 그려야 속이 후련해질 것 같았습니다.
뭘 그릴까 고민하다 피아노 연주를 하시는 손여은님을 그려 봤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달란트는 종이에서만 한정된 건가 봅니다.
판 타블렛 위에서는 선이 좀처럼 깔끔하게 그려지지가 않습니다.
색과 명암은 뭐 배운 적도 없고 칠해 본 적도 별로 없기에 딱 봐도 어설프기 그지 없습니다.
그래도 그림을 그려서 이렇게 올리니 마음이 좀 가벼워집니다.
그림에 흠뻑 빠졌던 그 시절로 제가 완벽하게 돌아갈 수 있을까요?
힘겹게 첫걸음을 뗀다 한들 그때 그시절처럼 그림에 불타오르기는 쉽지 않을 듯 합니다.
그래도 컴퓨터로 그림을 그려보니
색깔은 공짜로 마음껏 고를 수가 있어서 참 좋습니다.
물감 사는 돈 걱정도 안해도 되고
그림 그리다 굶어 죽을 일은 없을테니깐요
'일상디버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명가게 - 삼가조의를 표합니다. (29) | 2024.12.30 |
---|---|
2024 서울의 겨울 (64) | 2024.12.05 |
사패산 산행 (82) | 2024.11.10 |
코딩이 재미가 없다. (6) | 2024.08.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