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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독서 - 만화책은 보는건가요? 읽는건가요?

스푸79 2024. 11. 15. 20:00

 
내가 어렸을 때
집 근처에 아주 큰 은행이 하나 있었다.
그 은행은 손님들이 대기 시간 동안
무료함을 느끼지 않도록 읽을거리를 많이 비치해 두었다.
여성동아와 같은 월간 잡지가 많았는데
그중에 '보물섬'이라는 만화책이 있었다.
보물섬은 한 달에 한 번만 발행되는 만화책으로
가격이 5천 원이나 했다.
그 당시 짜장면 한 그릇이 천 원이었으니 엄청 비싼 잡지였다.
나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그 은행을 방문해
보물섬을 봤던 기억이 난다.
 
보물섬은 여러 장르의 만화를 연재했다.
'달려라 하니', '머털도사', '날아라 슈퍼보드' 등등
TV로 방영까지 한 유명한 만화들은 대부분 '보물섬'에서 연재된 작품들이다.
 
'보물섬'에는 순정만화도 있었다.
순정만화는 그림체와 내용이 여성적인 느낌이 강하게 풍겨서
남자들이 빠져들기가 쉽지가 않은 편이다.
무엇보다 다른 장르에 비해 페이지당 그림보다 글이 많은 편이라
어떤 때는 만화를 보는 게 아니라 만화를 읽는다는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비록 공짜로 보는 거지만
만화책 한 페이지 한 페이지가 나한테는 너무 소중했기에
열심히 읽으면서 봤던 기억이 난다.
 
...
 
'쾌락독서' 책의 작가인
문유석 판사님은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순정만화를 정말 좋아한다고 커밍아웃(?)을 하셨다.
물론 본인도 남자들이 좋아하는
'슬램덩크', '드래곤볼'과 같은 소년만화나 
'고수', '열혈강호'와 같은 무협만화도 즐겨 보지만
순정만화도 너무 좋아하신다고 한다.
특히 어릴 적 봤던 '베르사유의 장미' 이야기가 나올 때
나는 너무나도 반가웠다.
나도 순정만화를 즐겨 봤기 때문이다.
 
사실 성인이 된 후로도 나는 유명한 순정만화는 놓치지 않고 봤다.
'아오하라이드', '오늘부터 신령님', '너에게 닿기를', '월간순정 노자키'군 등등
 
특히 '노다메 칸타빌레'는 명작 중의 명작이었다.
우에노 주리가 나오는 일본 드라마가 만화보다 훨씬 더 유명하지만
원래 순정만화가 원작이다.
그리고 드라마보다 만화책에 훨씬 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많다.
 
옛날 어른들은 만화 보는 걸 아주 나쁜 짓한다고 생각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학교에서 만화방에서 다니면 불량학생으로 찍히기도 했다.
만화 보는 건 나쁘고 책을 읽는 건 좋은 것
뭐 이런 인식이 사람들에게 많이 깔려 있었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만화를 즐겨 본 덕분에
책을 읽는데 큰 도움을 받았다.
특히 순정만화는 특유의 긴 대사와 설명이 많은 편이다.
그럼에도 단지 만화라는 이유로
그런 긴 텍스트를 거부감 없이 읽게 되었고
그게 글 읽는 좋은 훈련이 되서
독서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순정만화는 아니지만 데쓰노트도 대사량이 장난없다. 대사만 모아도 중편소설 정도 분량이다.

 
만화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신의 물방울'이라는 만화를 통해
품격 있는 와인에 대한 방대한 고급 지식을 쌓을 수 있다.
육아 필독서 중 하나인 '마법천자문'은
억지로 공부를 시키지 않아도 아이들은 한자를 읽게 만든다.
 
'만화삼국지'는 또 어떤가
나관중이나 이문열의 삼국지를 읽기 전에
만화로 된 삼국지를 먼저 읽으면
10권짜리 방대한 대하소설의 내용은 물론이고
수백명의 인물들의 이름까지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무엇보다 중요한건
좋은 영향을 받던 못 받던 그게 뭐가 필요한가?
책은 재미있으라고 읽는 거다.
물론 뭔가를 배우고 얻으면 더 좋겠지만
꼭 그렇게 모든 일에 항상 생산적인 의미를 찾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이 책의 제목처럼 '쾌락독서'
소설이든 만화든 즐겁게 읽으면 되는 거다.
 
옛날 어른들은
만화는 그림만 보는 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만화도 책과 같다고 생각한다.
단지 그림이 좀 더 많을 뿐
둘다 보고 읽는 건 똑같다.
 
책이든 만화든
둘 다 눈으로 봐야
읽을 수 있는 거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