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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런한 사랑-일기에 답글만 달았을 뿐인데...

스푸79 2024. 9. 19. 00:00

 

 
나의 어릴 적 일기 쓰기는
난이도 상급에 해당하는 숙제였다.
학기 중에는 그나마 상급에 머물렀지만
방학 기간 동안의 일기 쓰기는
난이도 최상급을 넘어 극악의 숙제 중 하나였다.
 
일기장에는 날짜와 날씨를 표시하는 항목이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다른 숙제와 달리
며칠씩 몰아서 숙제를 할 수가 없었다
하루 일과는 온갖 거짓말로 꾸며낼 수 있어도
그 날의 날씨는
거짓말로 쓸 수가 없었다.
 
지금이야 인터넷으로 날짜를 검색을 하면
그날 어느 지역에 비가 왔는지 해가 떴는지 구름이 끼었는지
바로 알 수가 있지만
그 당시에는 날씨를 확인하는 방법은
그 날짜 신문을 찾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일기 쓰기는 정말 매일매일 꾸준히 해야 하는 숙제였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을 때
제법 머리가 굵어지고 나니
나는 일기 쓰기 숙제의 약점을 알게 되었다.
그것 바로
그 어떤 선생님도 일기를 전부 읽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선생님이 일기를 읽지 못하는 이유는 본인도 귀찮고 바쁘기 때문이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정확하게는 국민학교 다닐 때는 한 반 인원이 40~50명이나 됐다.
그 많은 학생이 30일이 넘는 방학 동안 쓴 일기를 검사한다는 건
사실상 거의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다.
날짜를 체크한다거나 내용을 읽고 사실 관계를 파악한다는 건
선생님이 숙제 검사에 거의 모든 시간을 할애해도
다 마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잘해야 페이지마다 대충 사인하거나 도장을 찍는 것이 전부였다.
일기 내용을 검토해서
그날 일기에 대한 선생님의 평을 남기는 것은
보통 부지런한 선생님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책에는 작가의 어린 시절
은선생님이란 분의 이야기가 나온다.
 
한 반의 담임으로서
여러 업무와 서류 작업이 있었을 텐데
그런 격무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자기 반 학생이 쓴 일기를 꼼꼼히 읽고
일기마다 답글을 남겨줬다는 이야기가
책에 나온다.
 
은선생님의 꼼꼼한 관심 덕분에
이슬아 작가는
더 열심히 일기를 썼다고 했다.
 
은선생님의 그 부지런함과
자기 학생에 대한 사랑이
지금의 이런 멋진 책을 쓸 수 있는
작가의 밑거름이 되었을 거라 생각된다.
그리고 본인도
그때 받은 부지런한 사랑을 그대로 자기 학생들에게 돌려주고 있다.
 
이 책은 작가가 은선생님에게
보내는 감사의 편지와도 같은 책이다.
그 시절 은선생님의 '부지런한 사랑'에 대한 보답이랄까
 
나는 부지런한 '사랑'까지는 아니지만
그와 비슷한 부지런한 '관심'을 자주 본다.
바로 인터넷에 흔히 볼 수 있는 댓글에서 말이다.
그리고 댓글에서 관심을 느낀다.
물론
욕과 비난으로 도배된 악성 댓글이나
성의없는 광고성 댓글도 있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응원과 격려가 담긴 칭찬의 댓글도 자주 볼 수 있다.
때로는 재치있는 댓글에
오히려 원래 보던 작품보다 더 큰 감흥을 얻기도 하고
더 크게 웃기도 한다.
그렇게 남겨진 한 줄 한 줄에는
댓글을 작성한 이의 부지런함과 관심의 흔적이 남아있다.
 
그렇게 쌓인 댓글은
웹툰작가, 소설가, 기획자와 편집자에게
아주 큰 동기부여가 된다.
웹툰이나 소설을 계속 읽고 싶다면
또 좋은 영상을 유튜브에서 계속 보고 싶다면
만드는 사람보다도
그것을 소비하는 우리가 훨씬 더 부지런해야 한다.
설사 내가 남긴 댓글에 하트나 좋아요가 없더라도
대댓글이 없더라도 말이다.
우리는 부지런히 우리의 관심을 그들에게 남겨야 한다.
그들이 창작의 열정이 꺼지지 않도록 말이다.